32년 전 오늘 이 시각,
1980년 5월18일 10시, 전남대학교 정문 앞 다리 위에서 계엄군 공수특전대원과 전남대학교 학생들 사이에 일어난 충돌이 ‘518의 발단’이라고들 한다.
학생들의 등교를 무력으로 저지하려는 계엄군 공수특전대원과 등교하려는 학생들 사이의 시비가 10시 경 부터 유혈사태로 번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의 겉껍질 한 부분만 보고 하는 말이다.
5월 17일, 신현확 국무총리가 주재한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의결하였다.
5월 17일 24:00시, 바꾸어 말하면 5월 18일 00:00시, 계엄군 공수특전부대 2개 여단이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에 진주하였다. 어떻게 그토록 빨리? 답은 간단했다.
계엄군 공수특전대는 이미 극비리에 광주 인근에 마련된 진지로 이동하여 숨죽여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공수특전임무에 더하여 고강도의 시위진압작전을 위한 ‘충정훈련’으로 단련한 세계 최정예 공수특전단의 ‘화려한 휴가’는 17일 24:00시 부터 시작되었다.
공수대원들은 전남대학교에 진입하자마자 연구실 강의실 도서관을 가리지 않고 들이닥쳐 밤샘공부를 하는 교수 학생을 가리지 않고 내 몰았다. 당신들 누구냐, 왜 그러냐는 사람들에게 보낸 계엄군의 대답은 ‘닥치고 폭력’이었다. 특유의 살상능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대검, M16소총, 진압봉(실제로는 살인봉)을 실력껏 휘둘렀는데 사용된 무기도 무기지만 특전단원의 몸뚱이 그 자체가 고성능 인간병기였다. 마치 ‘닭장 속에 들어 온 쌀쾡이’ 그대로 였다.
날이 밝자 정문 후문 가리지 않고 특전대원을 배치하여 학교로 들어오려는 학생들을 막았다. 그냥 막은 게 아니라 벌거벗겨 팬티만 입힌 채 무릎 꿇려 두 손 들게 하였다. 왜 그러냐고 한다거나 동작이 느리면 살인봉과 총검이 가차 없이 번득였다. 쓰러진 몸뚱이는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가버렸다. “두 팔에 이어 머리통을 탁, 탁, 탁 세 박자로 기계처럼 날렵하게 가격하면 돌팔매 맞은 병아리 같이 픽 쓰러지는데 사람 몸이 그렇게 허망할 수 없었다.” 급보를 받고 현장에 달려갔던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처 부처장 정교수의 말이다.
교내로 들어가려는 학생들은 크게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늘 하던 대로 휴일 없이 연구실이나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민주화 일정을 저지하려는 당국의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생기면 전남대학교로 모이자"는 방침에 따르는 학생들이었다. 그 ‘등교방침’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서 이루기로 한 ‘민주화 대집회’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의 중도 회군으로 무산되었다.
5월 16일,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서는 ‘민주화 횃불성회’이름의 시민 학생 한마당이 광장과 도로를 꽉 채우고도 넘쳤다. 이 한다당에서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민주화일정을 밝히라!’는 결의와 함께 ‘당국의 응답을 조용히 기다리자. 그러나 물리적 탄압이 구체화되면 전남대학교로 모이자.“는 방침을 냈다. 그런 다음 시가행진을 하였는데 유리창 하나 깨지지 않았고 가로수 한 잎 떨어지지 않았다.
‘비상계엄 해제’와 ‘민주화 일정 요구’에 대한 계엄당국의 응답이 바로 저 피 보라 몰아친 '화려한 휴가’였다.
또 그 화려한 휴가의 성대한 잔치는 1980년 5월 18일 10:00시가 아니라 5월 18일 00:00시(5월 17일 24:00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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